고(蠱)는 그릇(皿) 위에 벌레(蟲)가 있는 글자다. 오래 방치되어 안에서 썩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괘사는 이 괘를 크게 형통하다(元亨)고 판정하고 큰 내를 건너라(利涉大川)고까지 한다. 썩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이 곧 고칠 수 있게 된 순간이기 때문이다. 고괘가 흉괘가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이어지는 선갑삼일 후갑삼일(先甲三日 後甲三日)이 이 괘의 실무 지침이다. 갑(甲)은 십간의 첫날, 곧 새로 시작하는 날이다. 그 사흘 전과 사흘 후를 살피라는 말은 개혁의 착수일 앞뒤로 준비와 점검 기간을 두라는 뜻이다. 무엇이 왜 썩었는지 거슬러 살피고(先甲), 고친 뒤에 다시 썩지 않는지 지켜보는(後甲) 절차 없이 손대면 같은 부패가 반복된다.
"기쁨으로 남을 따르는 자에게는 반드시 일이 생기므로 고로 받았다. 고란 일이다(蠱者事也)." 수괘에서 사람이 따라오면 조직이 생기고, 조직이 생기면 반드시 처리해야 할 문제가 쌓인다. 서괘전이 고를 부패가 아니라 일(事)로 정의한 점이 중요하다. 문제 자체가 곧 해야 할 업무다.
잡괘전은 "고는 정비하는 것이다(蠱則飭也)"라고 했다. 칙(飭)은 흐트러진 것을 다잡는다는 뜻이다. 이 괘의 초점이 진단이 아니라 수선에 있음을 다시 확인시킨다.
"산 아래 바람이 있는 것이 고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백성을 떨쳐 일으키고 덕을 기른다(山下有風蠱 君子以振民育德)." 산이 바람을 막아 공기가 고이면 안에서 썩는다. 그 처방으로 대상전이 내놓는 것이 진민(振民),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다만 흔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덕을 기르라(育德)고 덧붙인다. 낡은 것을 걷어내는 일과 새로 채워 넣는 일이 함께 가지 않으면 개혁은 파괴로 끝난다.
고괘의 효사에는 아버지의 일(父之蠱)이 네 번, 어머니의 일(母之蠱)이 한 번 나온다. 앞 세대가 남긴 문제를 뒷사람이 감당하는 구도이며, 상속과 승계의 괘로 읽히는 이유다.
| 초육 | 幹父之蠱 厲終吉 | 아버지의 일을 맡는다. 아들이 있어 허물이 없다. 위태로우나 끝내 길하다. |
|---|---|---|
| 구이 | 幹母之蠱 不可貞 | 어머니의 일을 맡는다. 지나치게 곧게만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
| 구삼 | 幹父之蠱 小有悔 | 아버지의 일을 맡는다. 다소 후회가 있으나 큰 허물은 없다. |
| 육사 | 裕父之蠱 往見吝 | 아버지의 일을 너그럽게 넘긴다. 그대로 가면 부끄러움을 본다. |
| 육오 | 幹父之蠱 用譽 | 아버지의 일을 맡아 명예를 얻는다. 이 괘에서 가장 좋은 자리. |
| 상구 | 不事王侯 高尚其事 | 왕후를 섬기지 않고 그 일을 높이 숭상한다. 판을 떠나 원칙을 지킨 자리. |
육사의 유부지고(裕父之蠱)가 이 괘의 실질적 경고다. 유(裕)는 너그럽게 봐준다는 뜻이다. 앞 사람이 남긴 문제를 좋게 좋게 덮고 넘어가면 결국 부끄러움을 보게 된다고 못 박는다. 인정에 이끌려 손대지 않는 것이 이 괘에서는 실패로 분류된다.
구이에서 어머니의 일에는 곧게만 하지 말라(不可貞)고 한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같은 수선이라도 상대와 관계에 따라 강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뜻으로,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늘 정답은 아님을 인정한 드문 효사다.
산풍고는 물려받은 사업, 전임자가 남긴 문제, 오래 미뤄둔 정리 작업, 가족 간 승계에서 자주 나온다. 판정은 형통이며 방향은 착수 쪽이다. 다만 그 착수에는 순서가 있다.
선갑삼일 후갑삼일을 실무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손대기 전에 왜 이렇게 됐는지 원인을 거슬러 확인하고, 고친 뒤에는 되돌아가지 않는지 일정 기간 지켜볼 것. 이 앞뒤 절차를 생략하면 개혁이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나고 몇 년 뒤 같은 문제가 다시 올라온다. 그리고 육사를 자기 점검 항목으로 쓸 만하다. 지금 문제를 알면서도 관계 때문에 덮고 있는 것이 있는가. 고괘는 그 상태를 가장 나쁘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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